한산하기 짝이 없는 공항이 낯설지는 않았다. 사람 냄새 옅은 공간이 오히려 더 익숙하다. 윤철의 삶에 들어박힌 이들 중 인간은 몇 명이나 있었지? 하고 물으면, 족히 한 시간은 고민해야 오차를 모두 떨궈낼 수 있을 테니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윤철 스스로 정의한다는 맹점이 있더라도 대부분은 얼추 들어맞았다. 뭉툭해진 젓가락 한 짝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오감은 무시 못 하는 존재라고. 누구보다 열심히 인간 행세를 하는 윤철은 공항에 들어선 이래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 하윤철은 차가운 공항 바닥을 걷는다. 인간 하윤철은 언젠가 이곳을 완전히 떠난다. 인간 하윤철은 그곳에서 속죄한다. 인간 하윤철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삿된 기도문 같은 다짐이었다 새로 시작한다는 건. 저지른 일들을 모두 잊어야 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윤철은 적당히 취할 요량으로 라운지에서 위스키를 따랐다. 40도짜리 알코올을 마셔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비싼 죄책감이 뱃속 깊은 곳에 응축되는 듯했다. 속은 뜨겁고 겉은 서늘하다. 목덜미를 타고 진득한 소름이 끼쳤다. 새벽과 얼음의 조합 때문일 거라고 마음대로 유추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누군가도 남몰래 떠날 수밖에 없구나.
하윤철 씨.
그러나 하령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윤철은 제 짐작을 완전히 번복해야만 했다. 하령이 남몰래 떠나다니,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하령은 남편이 있었을 뿐더러 몰래 떠날 이유도 없었다. 유명 인강 사이트의 일타 강사인 하령은 언제나 사람을 몰고 다녔다. 유튜브에는 하령의 어록이 수두룩하게 널렸다. 니들 역사 공부 열심히 해라. 등한시하다가 뒤통수 맞는다. 하령은 떠돌아다니는 동영상마다 말했다. 그러다가 한국사 4등급 맞아서 최저 못 맞춘 의대 지망생 얘기를 해 줬다. 윤철도 우연히 하령의 강의를 들었었다. 하령의 음절 하나하나가 윤철에겐 아직 더 배워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출장 가는 거예요?
아뇨. 더 배우려고요. 존스 홉킨스 대학이요.
그럼 같이 가요. 뉴욕 들르잖아요.
하령 씨 남편은?
왜요?
안 보이시길래.
이혼했어요. 얼마전에.
주제가 굳을지라도 부드럽게 풀어내는 건 윤철과 하령의 주특기였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직업들이니까. 요즘 세상에 이혼이 대수겠어요. 윤철은 아예 이혼을 녹여 냈다. 그게 Disease든 illnesss든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말도 일삼으면서. 하령은 웃으면서 윤철과 같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학원가는 한 번씩 떠들썩해야 하거든요.
새벽발 퍼스트 클래스는 나름의 전세였다. 아무도 없는 앞칸에서 윤철과 하령은 나란히 앉았다. 이혼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두루뭉술하게 하면서, 윤철은 서진을 생각했다. 서진이 위자료를 얼마나 줬는지 뒤늦게 이해를 따졌다. 그러면서 혼자 후회를 일삼는 것이다. 혼자가 되도록 명목에만 매달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명목은 이따금 타고난 성적을 부지불식간에 바꿔 버린다. 그게 윤철이든 하령이든 마찬가지였고, ...... 어처면 윤철을 떠난 서진조차 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죽을 때까지 과거의 뒤꽁무니를 유추하기만 하면서, 폐인과 산송장같은 삶을 반복하는, 단단히 진부해진 삶을 타파하고자 타행길에 오른 게 아니라는 것을 도무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을 뿐.
윤철은 하령이 비밀리에 떠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생이 아닌 그저 순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일생의 변화에 가까워진다. 인간 하윤철이 오감을 모두 동원해 알아낸 사실이다.
그래서 후회해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외로워서 그래요.
결이 다른 것 같은데.
아니면 매몰돼서 그런 걸지도.
논문을 한 글자씩 노려보며 읽을 때 활자에 자주 매몰됐어요. 역사가 제 인생의 나침반인 건 맞아요 맞는데요, 수천수만 년의 빅데이터면뭐해요. 모두 지나간 자리를 마흔이 다 되도록 담습하는 기분은 아마 윤철 씨도 잘 아실걸요. 우린 그걸 남김없이 외우고 전달할 뿐이니까. 그래서 너무 외롭고요 또 외롭고요. 나 사실 외로워서 이혼했어요. 그냥 그게 다예요. 거창한 이유 따위 필요 없다는 걸 느끼시잖아요. 그런데 우린 또 외로움이 무색하게 순항하는 배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게. 어쩌면 이게 사학도와 의학도의 운명일지도. 하령은 윤철이 말할틈도 없이 고저 없는 문장을 쏟아냈다. 윤철은 공중을 가로지르는 내내 하령의 무던한 목소리를 곱씹었다. 운명이란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네포스가 말한 거예요.
땅을 밟자마자 하령은 윤철에게 명함을 건넸다. 한 달 정도 머무를 거예요.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보고 싶어도 연락하시고요. 막 캐리어를찾아 나온 윤철은 명함을 집어넣지도 않고 하령을 봤다. 차가운 형광등 때문에 하령의 얼굴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명함을 간직하기를기다리는 하령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죽을 것처럼 창백한 인간 둘의 얼굴.
태평양을 가로질렀는데도 여전히 새벽이었다. 해가 뜨면 달라질 것이다. 얼굴에 혈기가 돌고 싸구려 과일주를 마셔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조금 더 사람다워지는 거다. 하령을 만난다는 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논쟁했던 삶의 돌파구와도 같은 일일지도. 윤철은 13시간 사이에 자신이 아주 조금 더 평범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달리는 동안 하령의 명함 모서리 한 쪽이 구겨졌다. 차량 밖 어슴푸레하게 밝아지는 건물 옥상을 보면서 명함을 여러 번 만지작거렸기 때문일 테다. 성층권을 맨몸으로 날고 있기라도한 것처럼.
...... 이러한 연유로, 공항에서 헤어진 이후 하령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명함으로 의사표현을 대신한 것을 윤철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윤철이 하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오후 내내 대학에 다녀오느라 외투를 껴입은 윤철은 호텔의 냉수 페트를 모두 따 마셨다. 속은 차갑고 겉은 따뜻했다. 하령을 만나 40도짜리 위스키를 마시고 싶었다. 윤철은 침대에 걸터앉아 더 배우라고 닦달하는 것 같은 동영상 안의 하령을 생각했다. 운명론자를 비웃었던 과거와 쫓기듯 예약했던 뉴욕의 호텔이 윤철더러 운명을 스스로 만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함 한 장 따위를 들고서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그깟 연락이 뭐라고, 이륙하는 비행기가 호텔 창문에 비쳤을 때 윤철은 휴대 전화를 켰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인간 하윤철.
Ⓒ 호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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