佳煐
결국 모든 사랑은 피할 수 없다



이탈리아 가정집에는 에어컨이 없대요. 하령이 오트밀 색 카디건을 걸치며 말했다. 무원이 하령의 이마와 제 이마를 번갈아 만지며 열을 쟀다. 그럼 냉방병은 없겠군요. 무원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서재 의자에 앉은 하령이 몸을 한 바퀴 빙 돌렸다. 덥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하령이 무원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무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날개가 어디에 있든 에어컨 바람은 벽을 타고 내려온다. 그건 칠판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알았다. 얼굴을 시작으로 냉기가 어깨, 골반, 무릎, 발끝까지 차례로 스며드는 느낌. 하령은 언제나 제 모든 것을 걸고 열변을 토했으므로 목이 죄 갈라져 버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원을 부르는 입가에서는 어딘가 꽉 막힌 소리가 났다. 견뎌야 하는 왕관의 무게 같은 거였다.


하령이 의자에 두 다리를 걸어 올렸다. 무원이 기다렸다는 듯 옷장에서 접어 뒀던 담요를 꺼내서 하령을 김밥처럼 돌돌 말았다. 하령은 무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지중해를 찾았다. 선크림을 두껍게 발랐는데도 피부가 따가웠던 기억이 났다. 새로 산 샌들 모양으로 발등이 탔었지. 어디를 가더라도 와인과 담배가 있었다. 호텔 앞, 작은 젤라또 가게에서 팔던 레드와인을 떠올리면서 하령은 생각했다. 누가 담배를 피웠었더라.


하령은 책상 위에 있는 온습도계를 봤다. 초록색 화면에 적정량보다 높은 온습도가 적혀 있었다. 감기나 다름없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들은 유리컵에 들어있는 계피차를 마시면서 가수 계피 얘기를 했다. 오래전엔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을 좋아했었다고. 절판되어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노래 음반이 집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씨디 플레이어에 항상 들어 있어서 먼지가 앉을 틈도 없었어요. 하령이 막 웃었다. 그땐 그런 인디 음악이 유행이었거든요. 알고 계시잖아요. 무원이 하령을 따라 웃었다. 하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무원의 둥근 입매를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컵을 놓은 다음 턱을 괴고 말했다.


내년 3월에도 함께 있어 줘요.
무원이 하령에게 대꾸했다.
더플코트부터 삽시다.
하령이 눈을 휘면서 웃었다.
털어버릴 마른 모래가 없는걸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무원이 계피 막대를 휘적거리더니 컵에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었다. 알싸한 냄새가 방 안의 디퓨저 향과 섞였다. 그러자 공기가 무겁고 달짝지근해졌다. 계피 냄새를 맡은 하령이 무원에게 찬장에서 꿀을 더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무원이 서재 밖으로 나간 동안 하령은 아무도 모르게 계피의 말투를 따라했다. 무심한 듯 툭, 툭 던지는 노랫말이 심장에 턱, 턱 박혔던 어린 시절. 문득 무원과의 첫만남이 생각났다. 그때 하령은 이미 직감했다.


담요 안에 어느덧 온기가 서렸다. 하령은 돌아온 무원에게 내일은 뱅쇼를 끓이겠다고 말했다. 새 와인이 필요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내일은 일찍 퇴근할 거냐고 묻는 무원에게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당분간은 그럴 거라는 뜻이었다. 다음 달부터는 줄곧 달려야 되니까. 그럼 데리러 갈까요. 무원이 말하자 하령은 손으로 6을 만들어 보이고는 스피커로 바흐 음악을 틀었다. 잊고 있었던 계피의 노래를 떠올리면서.


하긴, 직장인은 원래 나인 투 식스죠. 무원이 웃었다. 보편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처지를 등에 매단 둘. 그래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면.


Ⓒ synxhexic

'隻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춤을 춰 리듬에 맞지 않는대도  (0) 2025.01.10
wipe your tears  (0) 2024.12.22
고공비행  (0) 2024.12.13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0) 2024.08.11
Plastic Love  (0) 2024.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