佳煐
신의 조각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알고 있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머저리는 아녜요. 내가 괜히 일타인가. 
 

 

 
일타는 눈치예요, 여기는 정글이고, 가령이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은 사람이죠. 가령의 말에 자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한 원형 유리 테이블을 가령이 손가락으로 툭, 툭  쳤다. 자성의 시서늘 의식하고 있는 눈치였다. 인간의 생이 운명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유구한 진리지. 현성이 죽었을 때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자성과의 미래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광활한 우주를 표류하는 것처럼 붕 뜬 느낌이었다. 
 
 


 
이 판에 잘 가르치는 선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령이 다시 자성에게 말을 붙였다. 자성이 숨을 크게 들이켜고 고개를 모로 꺾으면서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리고 당신은 살아남은 사람이지. 자성의 대답을 들은 가령이 슬쩍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제 뜻을 관철하기에 좋아보였던 것이다. 자성은 가령과의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를테면 여수에서 담배 대신 태웠던 폭죽이라든가. 서울에서 들어야 했던 모진 말조차도. 
 
 
 

 
자성은 가령의 첫 결혼식을 회상했다. 비즈가 박힌 드레스가 카펫이 깔린 바닥을 끌었고 길게 뻗은 흰 면사포가 가령의 뺨을 반쯤 가렸었다. 샹들리에가 달린 높은 천장이 탁 트여 있었고 자성은 그 아래, 신부 측 하객석에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잘 차려진 뷔페로 대충 끼니를 때운 다음, 그 다음엔 뭘 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가령이 이미 한번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여태 강사 일을 접지 않았다는 사실도. 
 
 
 


자성은 가령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직감했다. 가령을 통째로 도려낼지언정 멋대로 뜯어 버릴 수는 없다는걸. 잘못하면 손톱자국이 남으니까. 가령은 자성에게 그런 존재였다. 덕분에 지금까지 얽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자성이 따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꼴에 분위기를 내 본다고 오픈한 거였다. 가령은 자성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성이 저를 지켜보는 가령과 시선을 맞췄다.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귓전에 가령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일타는 눈치예요, 여긴 정글이고. 
 
 


 
하던 이야기나 다시 해 보자고. 
 


 
 
자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철저하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만남을 가질 요량이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과거는 모두 잊고. 가령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가령과 진득하게 얽힐 수만 있다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자성이 몸을 일으켰다.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에 살포시 내려놓고, 가령을 계속 뚫어지게 쳐다봤다. 가령이 자성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냈다. 이쯤이야 익숙한 일이었다. 수백 명짜리 강단에 서서 말하는 게 본업인데 뭘. 가령이 자성의 눈동자에 굴복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투자가 필요해요. 
 
어려운 일이라고 했잖아. 
 
그래도 꼭 필요해요. 
 
 


 
공짜로 신세 지겠다는 거 아니거든요. 가령이 자성에게 강수를 던졌다. 골드문 이미지 쇄신 필요하지? 그거 내가 도와줄게. 가령의 말을 들은 자성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제법 솔깃한 말이었다. 이미 가령이 내놓을 패를 알고야 있었다지만. 막상 가령의 입으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당분간은 가령을 철저히 옭아맬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곳을 멍하니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증명해 보라는 듯 가령에게 짧게 물었다. 
 

 
 
어떻게? 
 
이미지 세탁엔 교육만 한 게 없어. 알잖아요. 
 
 

 
 
가령이 자성의 와인잔을 들더니, 잔에 담긴 와인을 다 마셔 버렸다. 자성이 말릴 틈도 없었다. 아니면 증명이 필요한 건가. 가령의 중얼거림에 자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성의 표정이 변하기가 무섭게 가령이 제 낯을 자성에게 확 들이댔다. 명쾌한 확인을 요하는 태도였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고 타고난 성정이라면 타고난 성정이었다. 가령에게 중요한 건 곧 돌아올 자성의 대답. 
 
 

 

설마 나 못 믿어요?
 

 
 
 
자성이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당치도 않은 허구로 저를 떠보는 가령이 우습게 느껴졌다. 자성이 텅 빈 와인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 검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자성은 점점 잔잔해지는 잔을 바라보며 가령의 물음에 답했다. 의미가 모호한 대답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익힌 스킬을 가령에게 던질 날이 오다니. 자성이 잔 안의 와인을 따라 손가락으로 선을 주욱 그었다. 그리고 가령에게 말했다. 
 
 
 

 
딱 이만큼, 이만큼만 믿고 있어.
 
이런⋯⋯.
 
 
 
 
자성의 의미심장한 대꾸를 들은 가령이 눈썹을 팔 자로 늘어뜨리며 탄식했다. 곧 가령이 병목을 잡는가 싶더니, 자성의 잔에 남은 와인을 콸콸 쏟아냈다. 와인이 잔에 충분히 담기다 못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가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와인을 계속 부었다. 흘러넘친 와인이 자성의 검은 수트를 적셨다. 자성은 가령의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와인병이 텅 비자, 가령은 그제서야 병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 다음 꽉 차서 출렁이는 와인잔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유약한 유리잔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기세였다. 
 

 

 
이만큼 믿어 줘. 
 
⋯⋯.
 
 

 
 
자성은 침묵을 고수했다. 여상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어필하는 가령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떠한 결심이 선 듯한 태도였다. 별안간 자성이 벌떡 일어섰다. 몸을 일으킨 자성의 눈높이가 가령보다 한참 높아졌다. 가령이 지지 않고 자성을 올려다봤다. 팽팽한 침묵이 둘 사이를 얼마간 에워쌌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성이 가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 가르치는 선생들이 누군데? 
 
 


 
이윽고 가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synxhex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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