佳煐
공중댄스



첫 연애는 열다섯, 첫 키스는 열일곱에. 아무도 없던 영어학원 뒤편의 공터에서. 열아홉 살 때에는 첫 키스를 했던 그 녀석과 남이 되었고, 스무 살에 나간 과팅에서 맞은편에 앉아 소맥을 말던 남자는 애인이 되었다. 의대생이라 그런지 제가 잘났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 그녀와는 맞지 않았다. 한 사백 몇 일 사귀었나? 일주년 좀 지나고 얼마 못 가 쫑났던 것 같은데.



가령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옛 생각에 잠겼다. 다솔이 잠들고 나니 집이 적막에 휩싸였다. 탁자 위에 다솔이 놓고 간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널브러져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아이가 그리다 만 바다가 보였다. 가르쳐 준 적도 없을 텐데 명암 표현과 하얀 거품까지 조막만한 손으로 열심히 그린 것 같았다. 바다 좋아하는 건 날 닮았네. 제가 낳은 아이에게서 저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는건 여느 부모에게나 신기한 일이다. 가령에게도 그랬다. 언제 한번 데리고 바다 보러 가야지. 제주도가 좋으려나.



그녀는 늘 연애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애인을 데리고 바다에 갔다. 사춘기 이후로는 여름 바다와 겨울 바다를 보러갔다.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늘 혼자 다녀오곤 했는데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는 애인과 다녀왔다. 아 아니다, 그 남자는 애인이 아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남자와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여수에서 자라 여수 밤바다는 질리게 봤다는 남자와 여수에 갔다. 함께 바다를 보고, 포차에서 해물찜 하나 시켜놓고 소맥을 말고, 포차 근처 민박집에 가 몸을 섞었다. 호텔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양복을 입고 여수에 갔던 그 남자는 몇 년 뒤 양복을 입고 그녀의 결혼식에 왔고, 남편의 장례식에 왔으며, 지금은 ⋯.




도어락을 누르고 들어온다. 신고 있던 구두를 벗은 자성이 실내화로 갈아신고 거실까지 오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 상념에 잠겨 시간 가는 줄 모르던 하령이 그제야 시계를 본다. 막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안 자고 뭐 해.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잠이 안 오네요.

다솔이는.

아까 잠들었어요.

⋯⋯ 우리 산책 갈래요?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 가로등 밑의 고동색 벤치에 앉았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저절로 떨려온다. 어느덧 한기를 먹음은 가을 바람에 낙엽들이 힘없이 나부끼는 걸 보던 가령은 자성의 어깨에 기댔다. 자성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가령의 머리카락을 투박한 손길로 한 데 모아줬다. 그러고는 감기 걸릴 것 같으니 조금만 있다 들어가자고 말했다. 에어컨 아래에서 늘 열변을 토하는 가령의 직업상 감기와 따뜻한 차는 그녀의 디폴트값이 되었음에도.



그때 기억 나요? ⋯⋯ .

우리 여수 갔을 때. 그 뒤로 자성 씨가 나 피했잖아.

피한 적 없어.

거짓말. 내가 그거 때문에 마신 소주가 몇 병인데.
다시 가요. 다솔이도 데리고.

주말에 가자.


있죠, 나는 내가 바다를 좋아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파도를 이해하고 물결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니었던 것 같애. 그때 그 바다, 낭만 없는 낭만포차에서 먹었던 해물찜과 소주 두 병. 그건 뭐였을까?



제 마음이 隻愛일 거라고 믿었던 이들의 未練.

그랬으려나? 우린 樂園에 가진 못할 거예요.



가령은 자성과 여수에 다녀온 이후로는 바다에 가지 않았다. 남편과의 신혼여행지를 정할 때에도 휴양지는 한사코 거절하고 런던으로 다녀왔다. 낭만의 도시 파리도 아니고, 연인들의 밤이 연상되지도 않는, 스모그 짙고 비가 언제 내릴 지 모르는 런던. 창밖을 보니 그날의 런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낭만포차도 가요. 꼭 낭만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적당히 마시겠다고 약속하면.

여수삼합도 꼭 시켜야 하고. 비 와도 우산은 딱 하나만 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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