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요? 그리스 문명은 암흑시대에 가장 발전할 수 있었던 거. 아이러니하죠. 가령이 검은 비닐봉지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며 말했다. 자성이 캔을 가져가 따 주며 물었다. 암흑시대에 어떻게 발전을 해. 조수석에 앉은 가령이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원래 다이어트와 금연은 내일부터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가령이 어깨를 으쓱이자 자성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기원전 1100년경 그리스 북방의 도리아족이 남하했다. 철기를 사용하는 그들에게 청동기 문명을 사용하는 미케네 문명은 너무나도 쉬운 상대였고 그 후 그리스는 300여 년간 모든 발전 요소가 퇴보하는 암흑기를 겪는다. 하지만 으레 현실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존재하지는 않는 법. 일부 미케네인들이 밀레투스로 이주해 보호를 목적으로 공동체를 설립해 이후 그리스 민주정, 폴리스의 기원이 된다. 가령은 담배를 다 피운 후 자성이 건네준 맥주를 마시며 오늘 강의했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렸다. 서양 고대사는 처음 배울 때부터 정이 안 가. 오늘따라 맥주의 목넘김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한 잔만 마셔요. 어차피 내일은 일정도 없다면서.
가령이 캔을 흔들며 말했다.
운전해야지. 너 집에 어떻게 가게.
이 근처 택시 많아요.
지금 새벽 네 시야.
대화 끝에 가령이 웃고 말았다. 알겠어요. 그럼 나 집까지만 데려다줘요. 다음에 맛있는 거 살게. 대답을 들은 이는 알았다 답하는 대신 차의 시동을 켰다. 가령은 아무 표정도 없이 조용히 시동을 켜는 그를 바라본다. 자성을 보고 있으면 산토리니의 바다가 떠올랐다. 낮에는 푸르고 밤에는 한없이 깊은 어둠을 간직한 순백의 도시와 지중해. 어딜 가나 와인과 담배가 있던 도시. 그리고 또 바다. 바다를 한껏 눈에 담고 싶어 무작정 떠났던 스무 살 초반의 여행. 자성은 그 산토리니에서 본 푸른 파도 같았다. 뿌리가 없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파도처럼 언젠가 홀연히 떠날 사람. 잡힐 듯 잡히지 않아 그녀를 힘들게 하는 사람. 꼭 제 마음도 하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가령은 홀린 듯 내비게이션 속 시계를 보았다. 4:37 AM. 잠들기에도, 기상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창문 밖에서는 그녀에게 익숙한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 학교에 가던 길은 가령이 교복 입은 학생들을 가르치러 나가는 지금까지도 변한 것이 없어 괜스레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도태된 기분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생각을 애써 밀어내던 가령은 차가 멈춘 후 조수석 문을 조심히 열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가는 길에 졸지 말고. 뉴스에서 얼굴 볼 일은 없었음 좋겠네.
너나 가서 좀 자라. 오늘도 출근이라며.
잔소리 좀 그만해요. 나 걱정해 줄 사이도 아니면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 자성이 기어를 P에서 D로 바꾸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차를 계속 바라보던 가령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명을 보기에는 하늘이 아직도 어둡다. 손목에 찬 시계의 바늘은 어느덧 숫자 5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