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도 댓글 알바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디 여러 개 사서 댓글 창에 욕이나 박게 하고. 매크로로 사이트 마비시키고. 자기네 수강 후기에는 온갖 좋은 말들만 써 놓고. 저 선생님 강의 듣고 6모 6등급에서 수능 1등급 됐어요. 불안한 1등급이었는데 수능은 만점 받았어요. 완전 개념의 신. 문제 풀이의 선구자.
운 좋게 알고리즘을 타고 메인 홈에 뜬 유튜버가 열심히 떠들어 댔다. 조급하겠지만 인강 사이트 수강 후기 입시 커뮤니티 커리큘럼 다 믿지 마세요. 어차피 다 알바니까. 그렇게 휘둘리니까 실전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남들 계단이나 되는 거예요. 기본에 충실하세요 ⋯⋯.
딸깍.
하령은 표정 없이 영상을 꺼 버렸다. 말만 쉽다. 기본에 충실하려면 정보가 많아야 한다. 인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최고의 강사들이 지식을 떠먹여 주는 매체다. 아무거나 들을 수 있고 아무 때나 들을 수 있어도 결국은 선생을 믿게 돼 있다. 모르는 게 더 많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들이 댓글 알바를 쓴다. 하령은 노트북을 대충 덮고 쇼퍼백에 짐과 서류를 담았다. 다음 수능을 위한 새 커리큘럼을 짜야 했다.
정처하고 철저한 준비성은 일타 강사의 미덕이지. 더럽고 추잡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언제나 수많은 강사의 간판이 된다. 하령이 당연한 사실을 생각하며 무거운 가방을 들었다. 가방 끝에 닿은 작은 액자가 순식간에 앞으로 엎어졌다. 놀란 하령이 다급하게 액자를 주워 들었다. 얇은 유리가 깨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안도했다. 무원이 피하기 전에 재빨리 필름 카메라를 들이댔었다. 작년, 무원의 퇴근길에 함께 찍은 사진이다.
히령은 다시 의자에 앉아서 자신이 저지른 고백을 한 음절씩 되짚어 봤다. 적막한 사무실 안에서 서울대 독서실 바자 바퀴가 위아래로 부드럽게 굴렀다. 코트와 목도리가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하령의 회사가 승소하던 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나오는 레스토랑에서 무원은 단정 대신 질문으로 답했었다. 그럼 내일은 연인으로 만날까요. 하령이 무안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나. 유리잔 바닥에 깔린 레드 와인과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흰 테이블보가 고백을 망설이는 낯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자신을 몰아세운 적 없는 무원 덕분에 하령은 취조받는 기분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드라마에서 스치듯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취조실 차가운 조명 아래 시퍼런 노트북 화면, 그리고 겨울바람처럼 낮고 건조한 무원의 목소리 ⋯⋯.
무원은 언제나 질문이 많았다. 사건의 정황을 알기 위해서 당연히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법정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고 가진 카드가 많을수록 남을 꺾기 쉬우니까. 남을 꺾어서 벌어 먹고사는 사람의 운명 같은 거였다. 다행히도 무원은 제 기구한 삶에 정면으로 맞서는 중이었다. 연애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일방적인 대화는 아니었으나, 호승심과 열의에 불타는, 이를테면 세계지도를 가리키는 하령과 똑같은 눈빛을 가진 것이다. 무원은 그 눈동자로 하령에게 물었다. 타임 투 스터디에 근속하신 기간이 어떻게 됩니까. 평소 김 강사와 부딪힌 적이 있습니까. 김 강사와 일면식이 있는 동료가 있습니까. 수사가 괴롭지는 않으십니까. 액션 영화 좋아하십니까. 제가 불편하지는 않으시고요. 그럼 오늘 저녁 같이 드실래요.
무원과의 시간을 떠올리려면 상당히 많은 힘을 써야 했다. 마음의 전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원이 변하기 시작한 날을 알지 못해서. 한순간에 변하는 마음 따위는 없으므로 애당초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하령은 자연스럽게 무원과 첫 식사를 한 날을 손에 꼽았다. 인연의 시작인 셈이다. 처음엔 아무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결국에는 자주 보는 사람끼리 친해지기 마련이라. 둘은 그저 친구보다 조금 더 친한 사이가 됐을 뿐이다. 검찰청에서 무원과 하령이 처음 나눈 딱딱한 인사치레가 하령의 단순한 가설을 대변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령의 의자 바퀴가 불규칙하게 계속 굴렀다. 거슬러 올라가려니 밑도 끝도 없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관계라니. 일타 강사도 정복하지 못한 사람이 보란 듯이 하령의 마음을 가졌다. 혼자 남은 텅 빈 사무실에 하령의 전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원이었다.
주차장에 있으니 천천히 내려와요.
무원과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자신이 서울지검 소속 검사라고 말했었다. 사건을 서울에 맡겼으니 당연한 건데, 오히려 형식적인 자기소개가 무원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실제로 무원이라 해서 타인과 다를 게 없는데도. 시답잖은 편견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하령으로서는 꽤 이상한 생각이었다. 하령은 말없이 액자를 매만지다가 곧 짐을 챙겨서 삭막한 건물을 떠났다. 불을 끄니까 빈 공간이 너무 많아 보였다.
지하 1층 주차장 구석에는 검은 세단이 있었다. 무원이 고심하고 고심해서 고른 차였다. 그런 것치고는 무원을 너무 닮았다. 흔한 색에 흔한 모델이어도 왠지 무원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원만이 타고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무원은 늘 끝까지 남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모진 풍파를 겪어도 오백 년 된 소나무처럼 견디는 사람. 하령을 만난 이래 무원은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떠난 이가 되돌아올 때가지 기다리는 것은 근본 미덕이었다.
차에 탄 하령에게 무원은 당신이 이 시간에 마칠 줄 알았다고 말했다. 하령은 놀란 눈초리로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몇 번 접힌 끈에서 희미한 가죽 냄새가 났다. 무원은 하령을 돌아보지 않고도 하령이 원하는 답을 알아냈다. 아동차가 무겁고 고요한 엔진 소리와 함꼐 나선형 주차장 출구를 돌았다.
매번 지금쯤 연락하시길래. 퇴근한다고.
그 눈썰미 나한테 반만 나눠줘요.
생업에 필요한 거라 안 됩니다.
나도 강의할 때 필요한데.
하령과 무원이 동시에 웃었다. 잡음들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에 묻혔다.
무원 씨, 내가 오늘은 평소랑 다른 향수를 뿌렸거든요. 그런데 맨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그걸 한 번에 알았어요.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이 있어서 그런가. 그래도 어차피 다 체리 향인데.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어.
무원은 여전히 앞을 보고 말했다.
익숙한 냄새가 아니니까. 똑같은 향수가 아니면 전부 다른 거라면서요.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령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무원이 정직하게 엑셀을 밟는 사이 하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루브, 체리 머스크, 로스트 체리. 이름 없는 디퓨저의 수많은 블랙 체리 향이 하령의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강의실이 넓어서 인센스 스틱 몇 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검은 차가 강남 한복판을 부드럽게 달렸다. 죄다 익숙한 건물들이었다. 하령은 제가 어렸을 땐 은마 아파트도 그다지 낡지는 않았었다고 재잘댔다. 그땐 지하철도 4호선까지밖에 없었고, 사당이나 수원 같은 데가 종점이었다고. 남부터미널 대신 화물터미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대신 동대문 운동장. 더불어 역세권은 종로나 을지로 정도는 돼야 노릴 수 있었던 시절. 자랄 대로 자란 무원도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들. 하령은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강남에 있었다. 처음에는 학생으로 남았다가 어느 순간 선생으로 남았다.
그땐 댓글 알바 같은 거 없었는데. 하령이 말하자 무원이 반사적으로 하령을 위로했다. 힘들면 참지 말고 다 털어놔요. 정신 빼놓고 말하는 것 같아도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진심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령은 어차피 좋게 지난 일이니 괜찮댔다. 무원은 대답 대신 운전대를 고쳐잡았다.
오늘은 와인 한잔하고 가요⋯⋯. 바흐도 틀고. 애인이니까 이제.
이번에도 무원은 그래요, 라고 짧게 대답하고 골목 안에 차를 세웠다. 와인 오프너가 망가져서 새로 사야 했다. 무원은 하령을 차 안에 두고 지갑만 든 채 CU 편의점에 들어갔다. 적당한 걸 달라고 하니까 알바생이 카운터 아래에서 주먹보다 조금 큰 상자를 꺼내왔다. 작은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는데 별게 다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를 계승한 것처럼. 무원은 잠깐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있는 에델바이스 두 캔을 꺼내어 같이 계산했다. 네 캔 사면 만 원 이었는데 그냥 두 캔만 사겠다고 했다. 맥주도 마시자고 말할 요량이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같은 곳에 끝까지 남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맥주나 마시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거나. 가끔은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되거나.
무원이 돌아왔을 때 하령은 창문에 기대 자고 있었다. 고작 10분 남짓 한 시간이었는데 머리가 자꾸만 꾸벅꾸벅 흔들렸다. 낙원처럼 앳된 얼굴이 서른 줄 된 하령의 낯에 서렸다. 무원은 얼마간 멍하니 하령을 보다가 시동을 켰다. 히터를 틀면 답답해할까 봐 하령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줬다.
대로변에는 늦은 밤에도 차가 꽤 있었다. 야근한 직장인의 행렬이다. 저마다 비참한 몰골이었다. 사직서쯤은 품 안에 품고 다닐 거다. 무원은 말없이 그 행렬을 따라 달렸다. 신호를 받으니까 곧곧에서 빨간 제동등이 켜졌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앞으로 질주했다. 무원과 하령도 졸지에 행렬의 일원이 됐다. 시작한 곳도 도착하는 곳도 저마다 다른.
개싸움에 저울 들이대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쓸데없는 머리 대결 다 생략하고, 법전을 대가리를 내리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그런데도 계속 검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건 무원의 욕심 때문이다. 부모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무원을 나아가게 만들었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하령같은 사람과도 마주치는 법이다. 하령의 옷깃에서 나는 체리 냄새를 맡으면 벚나무 생각이 났다. 겨울이 다 지나간 것 같았다.
무원은 집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하령을 깨웠다. 다 왔어요, 일어나요. 무원의 목소리를 들은 하령이 정신없는 낯으로 눈을 반쯤 감았다가 떴다. 썬팅 때문에 창문 밖이 어두워 보였다.
업어 줄까요.
하령이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무원이 물었다. 막 하차한 하령은 실실 웃으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무원의 손에 들린 흰 비닐 안에 오프너와 에델바이스 두 캔이 보였다.
실없는 소리 마요.
둘의 구두 소리가 차에서 점점 멀어졌다.
Ⓒ 호재 님